

1. 프롤로그
많은 사람들이 하는 회고록, 하지만 단순히 유행처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꼭 해야만 할 것 같고 또 하고 싶어서 시작해보려 한다.
누가 이 글을 보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쏟아내고, 앞으로의 다짐을 새기며, 스스로의 시간을 조금 더 의미 있게 만들고 싶다. 무엇보다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매개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회고록이 내게 원동력이 되어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 블로그에 남길 이야기들이 면접관님들, 지인들, 혹은 우연히 들른 누군가에게 마냥 좋은 인상을 남기지는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 솔직하게 나 자신을 돌아보고, 더 강하게 채찍질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2. 대학 입학 전까지의 이야기
초등학교 시절, 아직까지도 또렷이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갑자기 어머니를 학교로 부르셨다. 예상치 못한 호출에 무슨 일일까 걱정했지만, 선생님께서는 내게 또래보다 영특한 면이 있으니 영재교육을 받아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셨다. 학업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셨던 부모님이었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으신 이상 최대한 지원해 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갑작스럽게 영재원 시험 준비 학원에 다니게 되었고, 시험을 치르는 당일까지도 모르는 것 투성이었지만 운이 좋게도 합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 중 한 명은 지금도 프론트엔드 개발자로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덕분에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영재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대표로 선발되어 대회에도 나갔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그때 좀 더 열심히 했다면, 지금 개발자가 되기까지 훨씬 탄탄한 기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공부보다는 노는 게 더 좋았고, 스스로 ‘조금 더 똑똑한 아이’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때의 나는 공부 자체에 흥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남들보다는 잘할 줄 알았다. 더군다나 IT 업계에 대해 또래보다 조금 더 알고 있었기에, 나는 늘 한 발 앞서 있고 특별한 존재라고 착각했다. 지금까지도 뭘 믿고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공부보다는 운동을 좋아했고, 축구도 하고 이종격투기도 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2학년 말, 함께 놀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공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앞서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뒤처지고 있었고, 그렇다고 뚜렷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남들과 다른 길을 가면 특별한 존재가 될 거라는 착각 속에서, 갑자기 음악에 도전하고 싶어졌다. 문제는 준비도 없이, 그것도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예체능을, 그것도 고3이 되어서야 결심했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학교도, 부모님도 달가워하지 않았고, 주변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때에는 주변의 반대를 뿌리치고 도전할 용기는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음악을 진심으로 원했다기보다, 단순히 남들과 다른 길을 가고 싶었던 것 같다.
결국 음악도, 운동도, 공부도 아닌 채로 고등학교를 마쳤다. 원래는 대학 진학을 원하지 않았지만, 부모님께서는 4년제 대학 졸업을 원하셨다. 그렇게 원서라도 넣어 보라는 부모님의 권유에 마지못해 지원했고, 운 좋게 합격하며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3. 대 학교 이야기
고등학교까지 별다른 목표 없이 살아온 내가 대학에 입학한 후 열심히 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수업을 빼먹기 일쑤였고, 멀다는 이유로 가지 않거나, 친구들과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학교생활을 열심히 즐긴 것도 아니었다. 입학 성적이 낮은 대학에 온 탓인지, 나조차도 그 대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사람들과 친해지려 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혼자 있는 시간이 늘었고, 마치 투명인간처럼 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그런 와중에 군 입대를 앞두고, 그동안 해왔던 서빙이나 전단지 배포 같은 아르바이트 말고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어졌다.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검색하던 중, 사무직처럼 보이는 콜센터 업무가 편할 것 같아 지원했고, 합격해서 일하게 되었다. 원래는 방학 동안 2개월만 할 계획이었지만, 연장 요청을 받아 조금 더 근무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힘들다고 말리는 콜센터 일이 나에게는 적성에 맞는 느낌이었다. 직접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객들의 문제를 들어주고 도와줄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렇게 군대를 가기 전에도, 다녀온 후에도,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도 콜센터에서 일했다.
한 곳에서만 근무한 것도 아니다. LG전자 수리 접수 센터, LG U+ 기술 상담 센터, CJ온스타일 홈쇼핑 콜센터 등 여러 곳에서 다양한 업무를 경험했다. 하지만 결국 콜센터 일을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께서 대학 졸업을 강하게 원하셨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어릴 때부터 '결혼'을 하나의 목표로 삼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 '콜센터 상담사'라는 직업이 상대방 부모님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떳떳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복학을 결정했다.
복학 후, 몇 안 되게 친했던 동기로부터 과 부학회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고민 끝에 수락했고, 그때부터 비록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 학교생활만큼은 최선을 다했다. 특히 신입생들을 챙기는 것을 내 역할이라 생각했고, 정말 열심히 챙겼다. 시간이 지나고 후배들에게 "우리도 그렇게까지는 못했을 것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렇게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면서 느낀 점이 하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챙기는 것을 좋아하고, 또 잘한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그런 생각 끝에 공과대학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고, 당선되었다.
학생회장이 되기까지의 과정도, 임기 동안의 시간도 쉽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나는 학생회 출신이 아니었다. 사실 부학회장이라는 자리는 공식적으로 학교에서 인정해주는 자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근거 없는 반대와 비난이 많았다. 처음에는 직접 찾아가 해명하고, 사과를 요구하거나 이유를 묻기도 했지만, 결국 끝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그들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 덕분이었다. 그 사람들은 지금도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고, 표현이 서툴러 직접 말하진 못했지만, 혹여나 이 글을 본다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공과대학 학생회장으로서의 1년은 참 많은 일이 있었던 시간이었다. 모든 순간을 이 글에 담을 수는 없지만, 학생회장으로서 나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 우리 학교도 그렇고,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겠지만, 학생회에 대한 인식이 너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바꾸려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바꿀 수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도전했다.
나는 학생회비를 보다 의미 있게 사용하고 싶었다. 이전과 차별화된 공과대학만의 행사를 기획했고, 학생들의 불만을 듣고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행사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경품을 더욱 풍성하게 준비하며, 학생들이 학생회비의 가치를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비판도 받았다. "혼자 정의로운 척, 착한 척한다"는 말들이 내내 따라다녔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아무리 내 생각이 옳아도, 그것을 남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그리고 지금도 가장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나와 함께했던 학생회 사람들을 충분히 챙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 곁에서 1년을 함께했고, 내가 무리한 요구를 해도 항상 지지해줬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충분히 고맙다는 표현을 하지 못했다. 미안하고, 또 고맙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 가까운 곳을 먼저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학생회장 시절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제, 내게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던 경험. SPP 3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나는 운 좋게도 숭실대에서 주관하는 SPP 3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여름 방학 동안 한 달간 미국 캘리포니아 주 USC에서 3주간 교육을 받고, 1주일간 기업 탐방을 하며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이 경험이야말로 내가 프론트엔드 개발자로 진로를 결정하게 된 가장 큰 계기였다.
말하기에 앞서, 그곳에서 함께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가 가까이 지냈든, 멀리 지냈든, 그 한 달을 함께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어떤 이유로든 나를 힘들게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제 와 돌아보면 그들도 내 성장의 한 부분이었다. 혹시 아직도 오해가 남아 있다면, 언젠가 대화할 기회가 생겨 고맙다는 말을 직접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 같은 기숙사 호실을 쓰던 형 중 한 명이 프론트엔드 개발자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그 형이 진행 중이던 팀 프로젝트를 보게 되었는데, 내가 알고 있던 '코딩'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설계 같았고, 세세한 기획 문서와 정성스러운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나도 해보고 싶다."
이게 디자인 때문인지, 기획 때문인지, 아니면 그 형의 열정 때문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날 이후 나는 프론트엔드 개발자가 되고 싶다는 강한 동기부여를 얻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고민이 많았다.
"프론트엔드 개발자가 되려면 뭘 해야 할까?"
내 학과는 IT 관련 수업이 일부 포함되어 있었지만, 컴퓨터공학과에 비하면 부족했다. 그래서 컴공과 수업을 추가로 신청해 듣고, Linux 특강에도 참여하며 기본기를 쌓아갔다. 그리고 주변 추천을 받아 '노마드 코더' 강의도 참고했다.
그렇게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나에게 맞는 여행' 이라는 주제로 졸업 작품을 기획하고, 구현하고, 발표까지 진행했다.
그렇게 나는,
험난했던 대학 생활을 마치고 졸업했다.
4. 졸업과 새로운 시작
그렇게 나는 졸업을 했다. 남들처럼, 특별할 것 없이. 그런데 어릴 적 상상했던 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졸업을 하게 됐다.
지금 되돌아보면, 지난 날들에 대해 조금은 후회가 들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후회라는 감정은 나에게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경험을 되새기는 것과 후회하는 것은 다른 일이니까, 후회하며 좌절하는 건 정말 피하려고 노력한다.
어쨌든, 나는 졸업 후, 지금 생각해보면 다소 잘못된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스스로 만족할 만큼의 깨우침을 얻고 취업을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바로 취업준비를 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그때는 취업이 지금처럼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
졸업 후, 나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정말 좋은 기회를 통해 실제로 사용되는 백오피스 어플리케이션의 프론트엔드 개발을 맡기도 했고, 스스로 흥미를 느끼는 주제로 여러 가지를 만들어 보았다. MZ세대의 단어를 검색할 수 있는 ‘MZ 사전’을 만들기도 했고, 포켓몬을 좋아해서 Poke API를 활용한 프로젝트도 해보았다. 또한, 배포된 내 웹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프로젝트의 양에 집착하다 보니, 구현에만 신경을 쓰느라 기본적인 동작 원리나 컴퓨터 과학 지식 같은 중요한 것들을 놓쳤다. 그렇게 프로젝트의 양을 늘리기 위해 1년을 보내고 나서야, 결국 이런 방식으로는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내 수준이 시장에서 요구하는 만큼인지, 취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일지 등 여러 가지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올해 초부터 이력서를 본격적으로 넣기 시작했다.
정말 아찔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사람인, 잡코리아, 원티드 등 채용 플랫폼에서 ‘프론트엔드’ 직무를 검색해 신입 또는 경력 무관 공고에는 다 지원했다. 여권이 없어도 갈 수 있는 지역이라면 어디든지 지원했다. 약 두 달 동안, 대충 500개 이상은 지원한 것 같다. 하지만 면접을 본 횟수는 4번 정도. 정말 많이 흔들렸다. '이 길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가 그때쯤이었다. 물론,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다는 걸 느끼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때는 정말 개발자를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많았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구체적인 계획도 세웠다. 그런데 운 좋게, 고민하던 중에 인스타그램 광고에서 멋쟁이 사자처럼 프론트엔드 심화 과정 모집을 보게 됐다. 그 과정에 신청했고, 다행히 합격했다. 그때부터는 이 과정만큼은 열심히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포기하자는 마음으로 다짐했다. 마지막인 것처럼.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이 지난 날의 경험과 내 생각들이었다.
5. 앞으로의 목표
단기적인 목표를 설정했다. 지금 수강 중인 ‘멋쟁이 사자처럼 프론트엔드 심화과정 4기’는 6월 초까지 진행된다. 그 기간 동안 정말 열심히 해서 수료를 마친 후, 다시 취업 활동에 전념할 계획이다. 이번 도전은 마지막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프론트엔드 개발자로서의 첫 번째 도전이 될 것이다. 물론, 아직 그 시작조차 하지 못했지만.
내가 열심히 하겠다는 구체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 매주 최소 하나 이상의 블로그 포스팅(기술 관련이 아니어도 괜찮다)
- 매일 하나 이상의 백준 문제 풀고, 그 과정을 깃허브에 기록하기
- 개인적으로 진행 중인 프로젝트 마무리 짓기
- ‘멋쟁이 사자처럼 프론트엔드 심화과정 4기’에서 떳떳하게 우수 수료생이 되기
남들이 보면 별거 아닐 수도 있다. 작게 잡은 목표들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목표를 너무 크게 잡는 것보다는 작은 목표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나가는 것이 더 효율적일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작은 목표들, 나는 반드시 이뤄낼 것이다.
이번 주까지 정리해야 할 것들이 조금 남아있다. 그 정리를 마친 후, 다음 주, 즉 3월의 마지막 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할 예정이다.
이 글을 아무도 안 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 글을 읽을 누군가를 위해, 그리고 달라질 나를 위해, 나는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기로 다짐한다. 정말로.
6. 마무리
이 글을 쓰면서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20살 이후의 나의 경험들은 어느덧 나를 '많은 것을 겪은 사람'이라고 느끼게 만들었다.
돌아보면, 정말 모르고 살았던 것 중에 하나는 나에게 고마운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아직 내 마음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그와 반대로 조금은 안좋은 얘기를 해보자면 내가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지 않았으면서도, 남들처럼 살 수 있기를 바랐던 적이 많았다. 또, 내가 남들과 다르고 특별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리 특별하지 않았고, 내 말이 항상 맞다고 믿었지만, 그렇지 않았던 순간들도 많았다.
그렇다고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것조차도 부족했던 것 같다. 아쉬운 시간들이 너무 많았다.
이러한 경험과 내 지금의 생각들을 토대로 앞으로 내가 개발자가 되든, 아니면 다른 길을 가든, 사람으로서 조금 더 나아지길 바란다. 그 변화가 이 회고록을 돌아보며 일어났으면 좋겠다.
프론트엔드 공부 기록 및 나의 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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